나의 아버지는 유년시절 나의 가장 닮고싶은 사람이자 닮기 싫은 사람이었다.
또 나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여전히 닮기 싫은 사람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 내가 모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아버지의 헌신과 사랑에 감사하지만, 나는 아직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 인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꿈은 아버지처럼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종종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유선 전화번호 하나가 가족 구성원들 모두의 연락처를 대표하던 1990년대. 그 시절 유치원생이었던 나는, 저녁 아홉 시 무렵이면 어김없이 전화기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아빠의 전화를 기다렸다. 퇴근길의 아빠는 늘 벽돌같이 크고 묵직한 모토로라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누가 먼저 수화기를 들든, 통화의 마지막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때 나의 가장 큰 낙은 두 가지였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와의 코뽀뽀 (어느 날 아빠가 프랑스 사람들은 코뽀뽀를 한다며 시작했던 우리만의 인사였다), 그리고 아빠의 회사 가방을 뒤져 달콤한 사탕과 캐러멜을 찾아내 내 비밀 서랍장에 차곡차곡 모으는 것이었다. 때문에 아빠가 회식이나 거래처 접대로 귀가가 늦어지는 날이면, 나는 거실 소파에서 엄마 옆에 이불을 덮고 아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간이 새벽이어도 개의치 않았다. 퇴근한 아빠를 와락 안아주고, 덤으로 언니 오빠 몰래 사탕 몇 개를 더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사실 여섯 살, 여덟 살 터울의 내 형제들은 이미 사탕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항상 늦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아빠의 전화벨이 울리기도 했다. 아빠는 수화기 너머의 언니나 오빠에게 내가 있는지부터 확인하고는, 내게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잠깐만요!"를 외치고는 온 집안 식구들을 소집했다. 다수결 원칙에 따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음식을 빠르게 선정한 뒤, 다시 수화기로 달려가 아빠에게 메뉴를 고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날 생선이어서 대부분 사시미나 스시를 외쳤지만, 가끔은 오빠의 취향을 존중해 족발이나 치킨을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나면, 우리 모두는 마치 둥지 안의 아기새들처럼 현관 초인종 소리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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