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의 첫 주말 아침, 낮은 함성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단잠의 고요를 깨뜨렸다. 우리가 사는 스튜디오의 창문은 이 도시의 오랜 시간을 기억하는 노인처럼, 칠이 벗겨진 거친 살갗을 문지를 때마다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더디게 열리곤 했다. 그 소음의 침입이 잠결의 신경을 할퀼 뻔 했으나, 이내 길들지 않은 호기심이 되어 우리 부부를 테라스로 불러냈다. 5월의 아침은 아직 쌀쌀했다. 청량한 하늘색은 짙고 푸르렀고, 바다와의 경계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빌딩 틈은 풍성한 나무와 도로를 액자처럼 담고 있었다. 함성으로 응원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배경으로 달리는 사람들. 마라토너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빌딩사이 틈으로 등장하고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은 막이 내리고 앵콜을 외치는 사람들처럼 환호했다.
나는 순간 짧은 신호탄 소리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화약냄새를 떠올렸다. 더불어 마른 흙을 맨발로 달리며 느꼈던 감각이 발끝을 움찔거리게 했다. 군중의 애정어린 환호소리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하고 목이 쉬어라 외치던 나의 어린 시절 운동회로 이끌었다. 어린시절, 5월은 단 하루있는 운동회만으로도 벅차고 설레는 달이었다. 4월 오후의 대부분은 운동회에 학부모들에게 보일 장기자랑 연습을 했다. 강렬한 햇살 아래로 눈살을 찡그려가며 단상 앞의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움직이면, 나도 모르게 흙먼지를 마셔 입안이 자꾸 텁텁하고 까슬거렸다. 촌스러운 무지개색 반스타킹과, 주름치마, 선캡을 쓰고 똑같은 안무를 해야했던 병아리들. 달콤한 솜사탕과 짭쪼름한 번데기와 고동, 각종 냄새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던 5월의 어린이 축제.
하지만, 5월은 운동회가 끝이 아니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그리고 스승의 날까지. 이처럼 다채로운 행사들은 어린 나에게 또 다른 축제와 같았다. 3남매 중 막둥이인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베이커리로 향해 때마다 내가 원하는 케익을 골랐다. 매번 특별한 날 먹는 케익은 달콤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달콤한 케익은 '어린이날' 먹는 케익이었다. 그 날만큼은 나에게 케익 위에 올라간 슈가클레이나 초콜릿을 두고 언니 오빠와 신경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이 생겼다. 그러니 당시에 방정환 선생님은 나에게 가장 위대한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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